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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작렬지: 삶이라는 지옥도에서

‘살아있는 것이 지옥이다.’

과격한 문장이지만 제게는 익숙합니다. 개인적으로 몇 년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한 저로서는 삶에 대해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으나 때때로 괴로울 때면 죽는 것이 오히려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잘 모르겠지만, 저는 작렬지를 읽으면서 십여년 전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었을 때 목도한 전파상 아저씨의 죽음이 생각났습니다. 손자와 놀아주기 좋아했던 아저씨는 전형적인 북방사람이었는데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곳까지 오게 되었고 노점에서 전자제품을 수리해주곤 했습니다. 그에게 가끔 소액의 ‘바가지’를 당하는 경우도 있어 젊은 혈기에 중국어로 말싸움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두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가 죽던 날, 그의 시신 앞에 구름같이 모여 있는 군중은 루쉰(魯迅)이 말한 간객(看客) 즉 구경꾼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감전사한 시신을 볼 용기가 없어 가던 길을 계속 걸었고, 미운 정 때문인지 그가 누운 자리를 살짝 뒤돌아본 순간 그의 잘생긴 발바닥이 너무나도 생생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카맣고 적당히 살집이 잡힌 발바닥과 아내의 서글픈 절규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겨울에만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었지만 본서를 읽으면서 다시 그가 생각났습니다. 자례가 겪은 풍랑에 그도 분명 섞여 그곳까지 흘러 왔겠거니라고 생각하니 이유모를 소름이 돋았기 때문입니다.

자례시의 쿵밍량과 주잉은 중국의 과거가 투영된 인물들입니다. 좀도둑이었고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지만 결국 거대도시로 만든 쿵밍량의 능력은, 개혁개방이후 짝퉁이라고 불리는 산채(山寨)를 기반으로 고속 성장한 중국을 대변합니다. 또한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결혼한 주잉도 매춘으로 성공을 거두고 복수를 위해 밍량과 결혼한 무서운 여자입니다. 처음 단순히 섹스라는 주제에 흥미를 느꼈지만, 그녀를 통해 내적 성장 없이 몸만 커버린 중국의 도덕적 타락을 나타내는 것 같아 오히려 서글펐습니다. 목적을 위해 삶과 몸을 수단으로 한 그녀의 삶을 곱씹어 보면, 자례는 마치 몸만 비대해진 ‘정신지체아’처럼 욕망에만 집중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저는 작품을 읽는 내내 ‘분명 중국도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이며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가 크게 다르지 않을텐데 왜 아무도 멈추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멈추는 것에 대한 선택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례가 대표하는 중국이 이를 계속하는 까닭은 과거의 가난함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현재의 부가 낫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상누각(沙上樓閣) 그 자체입니다. 쿵밍량과 주잉처럼 남의 것을 훔치고 매춘으로 이룬 기반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군가에게 기생해야합니다. 훔치고 착취당했던 것을 똑같은 그들의 이웃에게 행하고 그 이웃들은 다른 도시로 흩어져 다시 남의 것을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자례로 모아 발전했습니다. 다들 잘 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과거에 대해 아무도 논하지도, 논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외면합니다.

한편, 자례의 발전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기형적 명제를 그럴싸하게 도입한 중국의 자본주의를 반영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내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돈을 잃게 되는 한정재화의 싸움입니다. 결국 개혁개방을 거친 발전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기 부정으로 이룬 자본주의적 성공입니다. 이 같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가치관의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따라서 거대하고 가난한 농업국가의 자손들이 경험한 부는 그것만이라도 지켜야하는 가치였기에 이런 연극을 지속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이와 더불어, 주인공들의 욕망에 희생된 자례의 여러 인물들, 즉 민초(民草)들은 가족의 기억에서도 잊혀집니다. 사라진 민초는 풀이 무성한 무덤으로만 존재했으나 화장(火葬)이 시작되며 철저히 망각됩니다. 작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잘 살 수만 있다면 가족의 죽음과 딸의 매춘도 모른 척 할 수 있는’ 비정한 모습은 중국인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그 누가 즐거운 마음으로 도둑질과 매춘을 선택 할 수 있을까요?

또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이 집단에 희석되는 현실의 문제도 자례를 통해 표출됩니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을 위한 ‘자례시’는 작가의 군 경험을 통해 처절한 조직에 대한 비판으로 재해석됩니다. 조직생활을 통해 제가 느낀 것은 ‘아무도 나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였습니다. 개인은 무조건 조직에 충성해야 살아남지만 조직은 개인을 위해 희생하지도 신경써주지도 않습니다. 결국 수뇌가 되고나서 그 조직의 이익을 본격적으로 누리게 되어 중국을 포함한 수많은 사회가 부조리들을 묵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가 자례를 통해 꼬집은 것도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지만 제가 조직에서 겪었던 여러 경험들은 ‘자례 민초’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하기에 저와 그들은 어떻게든 권력에 붙어있고자 합니다. 미생과 같은 드라마를 보고 희열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는 그런 직장이 존재하기 않아서겠지요.

게다가, 저는 수많은 민초들을 그렇게 만든 쿵가 일족과 주잉을 비난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의 심연에는 그들의 일궈낸 화려한 성과와 부에 대한 강한 열망이 분명 존재하고 저 역시 남들보다 잘살고 싶은 욕심이 가득차있다는 것을 다시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욕망이라는 당의정(糖衣錠)을 다룬 이 책을 보며 중국인의 내적갈등을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저씨의 죽음을 마주하고 몇 시간 뒤 근처 식당에서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우연인지 그 자리엔 낮에 무관심했던 간객(看客)도 있었습니다. 그때 풍족하고 맛있는 음식 앞을 두고 갑자기 저는 구역감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몰랐지만 작가가 적나라하게 파헤친, ‘알면서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제겐 괴기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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