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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운명을 믿느냐 물으면 절반만 믿는다 말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하겠다. 이 책은 내가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책이다. 모임에서 결정된 책을 읽었을 뿐이다.

지난 2022년 3월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나는 힘든 시기에 책에서 답을 찾곤 하는데, 이번에는 책을 들춰볼 여유도 없었다. 뭔가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글은 커녕 영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계속 잤다.

내 현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 확진은 물론 여러 건강 이슈와 인간 관계, 일 등 많은 문제가 한 번에 몰려오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우울한 뉴스에 내 인생 자체에 우울증이 온 듯 했다. 모든 걸 놓아야 하나 고민을 한 게 얼마만인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채 끙끙 앓았던 적은 창업 시기 이후 처음인 듯 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참 우습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꽤 훌륭하게 회복했다.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관계가 남았지만, 그 자리는 새로운 것으로 채울 계획이다.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이 다시 재구성되는 시기가 고작 한 달 남짓이었다니, 그동안 아등바등 했던 게 스스로 우스워보일 정도다.

그리고 꽤 회복된 내게 운명처럼 이 책이 찾아왔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름은 수도 없이 들었던 그 책이다.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이란 이름은 못 외워도 죽음의 수용소는 들어봤을 것이다. 나치 시절 지옥을 현실화 했던 수용소. 저자 빅터 프랭클은 무려 3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아남았다.

2차 세계대전 이야기는 학창시절 억지로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통해 어두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된 지금 죽음의 수용소 이야기는 과거 내가 경험한 공포와 두려움 등이 떠올라 다소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저자보다는 훨씬 짧은 시기였지만 군대 훈련소가 떠올랐다. 두려움에 떨며 입대해서 머리를 밀리고 현실을 강제로 지워냈던 기억. 비슷한 나이 청년이라는 것 외 아는 게 없는 동기들.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했던 교관들. 감히 수용소에 비할바겠냐만은 그 시절 느꼈던 공포감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머리털뿐만 아니라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조리 다 깎아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를 하려고 다시 줄을 섰다. 서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인간이 가진 공포는 다 똑같구나 싶더라. 하루하루 견디는 것 만큼 힘든 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견뎌내면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는 게 신기했다. 정말이지 일주일은 짧은데 하루는 길었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그래도 군대는 정해진 기간이 있었고 하루하루 날짜를 지우며 버텨냈다. 만약 군 생활은 정해져있지만, 훈련소를 떠나는 날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그때 느꼈던 감정은 조금 달랐을 것 같다.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3년 동안 겪은 이야기를 몇 페이지 정도로 어떻게 이해하겠냐만은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내는 등 몇몇 지점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현대에 사는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식의 진행이었으면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과거보다 현재가 좋기에 행복해야 한다는 관점은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 책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최근 깊었던 구렁텅이에서 내가 빠져나왔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풀었다. 삶의 의미 말이다.

삶의 의미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지난 3월은 내가 그려온 큰 그림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시기가 됐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열심히 그려둔 그림이 모조리 부숴졌을 때 그 막막한 감정을 겪었다. 아직 부숴지지 않은 그림도 어쩌면 앞으로 그릴 그림과 맥락이 다르기에 다시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남은 그림을 나 스스로 부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빅터 프랭클도 수용소에 들어간 뒤 책 원고를 모조리 빼앗겨 힘들어했다. 인간이 이렇게 나약하다. 손에 쥔 뭔가를 빼앗기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좌절감을 겪는다.

와르르 무너진 내 그림을 보며 그림을 그렸던 시기를 떠올렸다. 어차피 무너질 그림이었다면 나는 그동안 왜 이 그림을 그렸나 싶었다. 무너진 그림이 현실이라면, 그동안 나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았나 싶었다. 현재의 나를 구성했던 과거가 부정당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낸 내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 도저히 그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공허했다. 마침 코로나 확진으로 집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과거와 현재가 모두 부정당했다면, 과연 내게 미래가 있을까 싶었다. 미래가 없다면 내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싶었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가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 많은 사람이 새로 얻게 된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나를 마주하는 많은 게 힘들어 혼자 있고 싶었는데, 막상 혼자 있으니 그게 또 힘들었다. 가진 걸 잃어서 너무 아팠다. 아프고 아프다 보니 이거보다 더 아픈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가장 아픈 거라면 이제 더 아플 일은 없는 것 아닌가?

문득 내가 정말 다 잃었나 생각해봤다. 여전히 남은 걸 다 버려야 할까 싶었다. 혹시나 싶어 머릿속으로 내 모든 걸 던져봤다. 더 버리려 했지만 버릴 수 없는 온전한 나만의 것이 여전히 남아있더라.

이제 더 버릴 수도 없고, 이제 더 아플 수도 없다면. 이미 다 버렸고, 이미 다 아팠다면. 그럼 이제 겁 없이 더 그림을 그려도 되는 것 아닐까? 마치 항체가 생성돼 다시는 확진될 확률이 낮아진 펜데믹처럼. 어쩌면 아픔을 겪었던 분야에서 나는 꽤 강한 항체가 생긴 것 아닐까?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 다 버렸더니 꽤 괜찮아지더라. 앞으로 얻을 일만 남았다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이 나아지니 여전히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게 눈에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기며 내게 속삭였다. 다시 찾아보라고. 삶의 의미를.

로고테라피

최근 몇 년 동안 정신과를 가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아직 가보진 않았지만 병원을 알아보기도 했었다. 아마 다음 위기에는 병원에 가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있을지 모르지만 로고테라피 이론을 따르는 의사가 있다면 만나보고 싶어졌다. 수용소에서 바닥을 경험한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사회를 살아가며 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지난 3월은 내게 3번 의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줬다. 시련에 관해 내 태도를 선택해야 했고, 이번 시련도 어쨌든 잘 극복한 듯 싶다. 그 과정이 썩 고통스러웠지만 아마 같은 시련이 온다면 이번엔 나도 호락호락 하지 않을 것 같다.

시련을 이겨내며 꽤 많은 휴식을 부여했다. 그런데 휴식보단 로고테라피 이론처럼 어떤 과제들이 내게 더 힘을 줬다. 생각해보면 휴식을 더 취한다고 해서 에너지가 더 충전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못 해도, 언젠가 로고테라피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와 내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 생각한다.

마무리

매달 서평을 써왔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무려 두 달을 거르게 됐다. 지금 되돌아 보면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싶다. 빅터 프랭클은 내 상황에 유머를 넣을 수 있으면 치료할 수 있는 단계라고 했다. 아마 나도 그래서 치료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이런 부지런함은 내 캐릭터지만 아무리 부지런해도 완벽한 평화를 얻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다행히 빅터 프랭클은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어쩌면 그게 더 우리에게 위험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 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종종 내 미래가 기대될 때가 있다. 이럴 땐 내 몸에 에너지도 넘치고 시야가 또렷해진다. 자신감이 붙고 기분도 좋다.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전히 나는 내 삶에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나는 선택지를 보며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오늘이다.

한줄평

명작은 이유가 있구나.

인상 깊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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