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W

때때로 놓고 싶었던 강한 자아가 마음에 들어진 순간

‘신은 죽었다’

이 말 외에 사실 니체에 관해 잘 몰랐다. 몇해 전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를 읽었는데, 읽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지 꽤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건 완전히 잊었었다. 그런데 다시 서평을 읽어보니 <마흔에 읽는 니체>를 읽으며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서평]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

초인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참 어려운 존재다. 끊임없이 자신을 경멸하며 파괴하고,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며 지속 발전해야 한다. 편한 친구들과 있을 때면 기회가 닿을 때마다 뭔가 더해야 한다고 말하는 편인데, 사실 내 삶 전체에 이 모토를 지키기는 꽤 어렵다.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비판하는 시간을 갖는다.

얼마 전 친구들과 13년 동안 운영하는 스튜라는 커뮤니티에 관해 이야기 하게 됐는데, 13년 동안 꽤 많은 친구들이 스쳐 지나갔더라. 그렇게 끝까지 남은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있자니 나도 참 많은 고통을 받았더라. 그때마다 나는 누군가 내 그릇을 시험하는 것 같아서 시험을 이겨내고자 어려움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13년이 흐르니 대부분은 내가 견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고통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했으니 말이다.

초인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두 번째 창업을 시작한지 어느새 1년이다. 요즘 힘든 건, 나야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게 늘 하던 것이지만,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다. 모두가 고통을 성장 과정으로 생각하지는 않고, 또 내가 경험한 성장 과정을 똑같이 경험하진 않았으니 서로가 생각하는 게 다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힘든 이유는 내 동료들이 여전히 나를 믿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겪으며 스스로 성장하는 건 자신이 있고, 내 동료들도 이 과정에서 성장하리란 확신이 있다. 다만 나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고통을 보고 있자니 꽤 힘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럴 때마다 내 선택이 정말 옳았는가에 관해 지속 사색하는 편이다.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통해서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어 왔던 가치가 정당한지를 진지하게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한걸음 더 다가가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서 내 동료들 또한 이런 경험을 느끼고, 나아가 그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늘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리스도교

얼마 전 오래된 친구가 찾아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종교에 꽤 빠져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로 완벽히 빠져있을지는 몰랐다. 물론 사이비교는 아니지만, 더이상 나와는 어떤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쉽긴 했다.

최근 알게돼 종종 만나는 대표님이 있다. 사업 고민을 나누던 중 어려운 시기에 종교에 기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종교는 없지만 성당이든, 절이든 어디든 가서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마음은 편해졌던 것 같다며, 힘들땐 종교에도 기대보라 권유했다.

나는 천주교 모태신앙으로 20대 중반까지 꽤 오랜 시간 성당에 나갔다. 그냥 신자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활동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아쉬움을 명확한 문장으로 발견했다.

니체는 약한 자들을 본능적으로 서로 뭉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나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물론 굉장히 모났던 학창시절 내 모습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준 감사한 사람들이 있다. <마흔에 읽는 니체>를 읽으며 그때의 감사했던 여러 선배들이 떠올랐다. 참 미성숙했던 내 모습들이 오버랩되며 미안한 감정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가 원한 건 어떤 새로운 그림이었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나는 어떤 그림을 끊임없이 원했고 결국 그 그림을 찾아 떠났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이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병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고 두려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신이 결과적으로 인간을 더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자신을 광인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한 이유이다.

누군가는 이 문장을 보고 신성모독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니체의 말이 내 간지러운 부분을 잘 긁어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제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초인의 삶일 것이다.

나는 그저 매주 모여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때때로 힘에 부칠때면 그 시절 나를 받아줬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느껴왔다. 잠시 휴식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그곳에 없다고.

내 이야기를 만드는 것

나는 학창시절부터 모든 성격유형 검사에서 주도적인 편으로 나왔다. 최근 다시 유행하는 MBTI는 ENTJ로 할때마다 바뀌지 않더라. 그런데 대학 시절까지는 이 성격대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나는 내 학창 시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대학시절 완전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이들은 나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게 무척이나 신기했다. 내가 강한 캐릭터가 되고자 하면 그렇게 됐고, 반대로 하면 또 반대로 여겨졌다.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캐릭터로 여겨진 적이 많지 않은데, 우연히 첫 학기에서 1등을 하고는 4학년 내내 공부를 잘 하는 캐릭터로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사회에 나와서는 내가 보이고 싶은 캐릭터로 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려 노력했고, 해를 거듭할 수록 내가 원하는 모습이 돼 갔다. 때문에 나는 모든 부분에서 만족하진 않지만, 늘 과거에 비해서는 오늘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현재 절망스럽고 후회스러운 날이 많다 해도 걱정과 후회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위기와 곤경에 빠졌던 순간이 큰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과거를 받아들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누군가의 앞에 서서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낀 적이 많다. 외모가 극히 뛰어나다거나, 두뇌가 극히 뛰어나다거나, 뭐든 극도로 뛰어난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초라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든 앞에 섰을 때 나라는 존재가 각인될 수 있었으면 했다. 이는 결국 ‘비교’의 영역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러니까 나만의 유니크한 뭔가를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만든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내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 앞서서 늘 말을 많이 했다. 내 이야기를 억지로 각인시켰던 것이다. 때문에 말이 많다며 나를 피했던 사람도 많다.

조금 경험이 쌓이고서는 도전해봄직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도전을 해봤다. 창업도 해보고, 프리랜서도 해보고, 직종도 옮겨보고. 그랬더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내 이야기 자체가 유니크해졌더라. 그렇게 상황에 따라 내가 유니크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상대에 따라 나를 다르게 보일 수 있게 하는 능력치와 상대가 없는 내 이야기를 건낼 수 있는 능력치 등을 익혔다. 내 이야기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조금씩 만들어지니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내 이야기를 나와 함께하는 이들이 ‘우리 이야기’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목표들이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을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경험을 그 반대의 것으로, 합목적적인 것을 무목적적인 것으로, 필연적인 것을 임의적인 것으로 전환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운명처럼 생각한 일, 꼭 이루고 말겠다던 목표, 기대했던 경험들보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우연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워하고 웃음이 터질 대 소소한 행복감이 찾아온다.

내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내 이야기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연예인을 선망하진 않지만 큰 무언가가 아니라도 그냥 한 번 마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몇 번 더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종종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나처럼 적극적으로 내 이야기를 보이며 알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꽁꽁 숨기면서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기 위해 저마다의 노력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또 다른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과 만나 어떤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그 일상을 사소하게 여기던, 여기지 않던 말이다.

어쩌면 이시대 초인은 그런 사소한 일상에서 자신을 부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마무리

진지하다 못해 무겁디 무거워진지 1년이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어느 정도까지 노력하면 된다는 어떤 규칙 따윈 없다. 그저 원하는 걸 얻기까지 지속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뭔가를 원했을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어쩌면 원하는 걸 얻는 것보다 뭔가를 원하는 이 감정 자체가 이미 축복이 아닐까 싶다. 이 감정 자체가 지난 1년 동안의 모든 것을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버거워서, 힘들어서 때론 놓고 싶었던 나의 강한 자아가 썩 마음에 드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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