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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공급망에 엮인 세계 패권을 정갈하게 담았다

매번 재밌는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읽을 수 없어 참 아쉽다. 어디 휴양지 리조트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읽다가, 졸다가. 여유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다.

지루한 부분은 스킵하기도 하고, 조금은 속독을 하며 빠르게 읽어냈다. 그래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라 시간이 꽤 걸렸다. 덕분에 반도체라는 것에 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됐다. 그간 내가 해왔던 질문이 좀 부끄러워졌던 시간이었다.

소프트웨어 vs 반도체

사실 반도체에 관심이 있었다. 2021년쯤? 한창 코로나를 극복하며 주가가 호황일때 스튜 투자소모임에서 반도체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SK 하이닉스를 다니던 친구도 있었고, 반도체 산업에 투자를 했던 친구들도 많아 꽤나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갔다.

이때 내 질문은 이거였다. “왜 반도체는 수율이 절반도 안 되는가?” 수율이라는 건 투입 수에 따른 양품의 비율로 얼마나 정상적인 제품을 만드느냐다. 소프트웨어 산업만 경험한 나로서는 절반이 오류라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아 수차례 물어봤고, 결국 이해까지는 못했다. 그때 분석됐던 기업이 ASML로 기억한다.

이 모든 도전을 넘어 충분한 에너지와 신뢰성을 갖춘 레이저를 만들기까지 10년 걸렸다. 각 레이저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은 정확히 45만6329개였다.

본문에서 ASML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이 내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각 부품이 모두 전문 영역이고, 물리학, 화학 등 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기를 활용해 나노 단위 작업을 진행하는데, 왜 절반이 오류냐며 의아했던 내 모습이 굉장히 어처구니 없게 느껴진다.

2013년부터 ASML의 극자외선 장비 사업을 이끌고 있는 네덜란드인 프리츠 반 하우트에게 있어서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개별 부품이 아니라 ASML의 공급망 유지 기술이었다. 반 하우트는 ASML이 그러한 비즈니스 관계망을 “마치 기계처럼” 갈고닦았다고 설명했따. 수천여 회사가 ASML의 정확한 요구 사항에 맞는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하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을 떠나 ASML의 파트너십에 경의를 표한다. 수천개 기업과 함께 수천억원의 기기를 만들다니. 이 파트너십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있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영업 사원의 입장에서 너무도 무거운 작업이라 이들이 만든 해자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ASML 이야기 외에도 TSMC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인상 깊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대통령이 TSMC도 지분 절반을 정부가 가지고 있다며, 국민들에게 지분을 나눠주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고 나 역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지분 절반이 외부에 있을 경우 생기는 문제들이 마구 떠올랐다. 그런데 TSMC는 이를 정부가 해냈고, 이게 무려 1987년이라는 사실이 굉장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된 줄 몰랐다.

리궈딩 장관은 약속을 지켰다. 모리스 창이 그려 온 비즈니스 모델을 위한 자금을 끌어온 것이다. TSMC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의 48퍼센트는 대만 정부가 제공했다. 대신에 창은 앞선 기술력을 지닌 해외 반도체 기업을 찾아와야 했다.

소프트웨어 역시 굉장한 규모의 분야지만, 반도체 산업에 관해 굉장히 무지했음에 놀라웠다. 과거 <벨 연구소 이야기>와 겹치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내 주식 계좌도 조금은 달랐을텐데 말이다.

[서평] 벨 연구소 이야기 ★★★★★

결국 강자들의 설계

다소 씁쓸한 것은 이 모든 게 강자들의 설계라는 거다. TSMC도, 삼성도. 결국은 미국의 설계에 의해 ‘허락’됐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지분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해온 내 지난 3년이 우습게 보인다.

한국은 두 거대한 숙적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을 해온 나라였다. 이병철이 삼성을 창업한 지 7년이 지난 1945년, 일본은 미국에 패배했고 이병철의 무역업은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병철은 날렵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건어물 물량을 확보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치 후견인을 바꿨던 것이다. 그는 전쟁 후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국인과 유대를 쌓았고, 그의 회사와 같은 대기업 집단을 해체하고자 하는 한국 정치인들에 맞섰다. 이병철은 심지어 북한의 공산 정권이 남한을 침략했을 때에도 재산을 지켜 냈다.

삼성을 만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해외 서적에서 이병철 회장의 이야기를 읽자니 새삼 놀랍다. 두 차례 전쟁을 이겨내면서도 결국 우리나라는 지키는 방어선으로 삼성을 키워냈으니 말이다.

1983년 2월, 신경이 곤두선 불면의 밤을 보내던 이병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삼성전자 사업부를 총괄하던 수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포했다. “삼성은 반도체를 만들 걸세.” 삼성은 적어도 1억 달러를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선언과 함께 그는 회사의 미래를 건 반도체 도박을 시작했다.

과연 나는 대표자로서 어떤 고민과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이정도 압박에 시달려 봤는지. 이병철 회장 스토리에서는 번역서임을 잊고 그대로 책 속에 빠졌던 거 같다.

그래서 그 다음은.

반도체 전쟁은 수십년을 지나왔고, 어쩌면 아직 본격 시작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칩이 들어갈 것이고, 모두 통신을 하고, 모든 순간이 데이터로 저장될 것이다. 반도체 공급망은 국가가 아닌 세계 차원에서 관리되고, 주요 공급망 국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반도체 공급망이 곧 국방력인 것이다.

아이폰에서 가장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되고 중국에서 조립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대만뿐이다.

AI 시대가 시작됐지만, 이 역시 반도체 전쟁의 연장선이다. 대표자로서 어떻게 해야 이 공급망 한 켠에 자리할 수 있을지 그저 고민이 될 뿐이다.

마무리

방대한 내용을 정갈하게 정리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부분은 다소 지루했으나 중간 이병철 회장과 ASML 이야기부터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ASML의 수천개 기업과의 파트너십은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이다. 조금 더 파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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