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따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 출판사(문학동네) 에서 제공하는 이미지 를 첨부함.
[ 읽게 된 동기 ]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이 좋아하신다는 작가의 책. 책 내용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작가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책을 대출해서 읽었지만 생각 이상의 경험을 하게 한 책.
[ 한줄평 및 별점 ] ★★★★★ ( 5점 / 5점 ) 나는 이 소설을 거대한 시류 안에서 삶을 지키려는 이들의 이야기로 읽고싶다.
[ 서평 ] 사전모임 이후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다. 그러나 독서모임 지원서에 써냈던 책으로 첫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아직까지는 이 작품이 가장 인상 깊으며 책을 읽을 당시 기록해둔 구절들도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요인물은 사회주의 사상에 몸담았다가 탈당 후 양극단의 길을 걷고 있는 버나드와 준이다. 소설은 그들의 삶을 회고하는 사위 제러미의 회상으로 전개된다.
작품을 읽으며 인상 깊은 구절에 표시를 해두었는데 마치 논문을 읽었을 때처럼 인덱스가 가득 찼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소설 문장 안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탁월한 묘사능력이 놀라웠다. 소설은 194,50년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대의 역사를 공부하며 읽어도 좋을 정도로 역사성이 짙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좌우 양파간의 대립이 있던 정치, 역사적 상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기에 역사를 고려한 책읽기를 해보는 것도 좋은 읽기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그저 ‘삶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읽었다.
앞서 밝혔다시피 버나드와 준은 열렬한 사회주의 당원이었다. 사회주의는 그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에 사상에 대한 신념과 그들 두 부부의 사랑, 젊음, 열정 등은 사상과 함께 서로 뒤얽혀 있었다. 그러나 정당에서 탈당하고 열정이 빠져나간 이후 두 사람의 빈 공간을 채운 사상은 각각 너무도 다른 특성을 띤 것들이었다.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과학자와 직관론자, 활동가와 기권자가 버나드와 준이 새로이 심취한 삶의 형태였다. 그 둘은 탈당 이후 내내 자신의 신념 극단에 서 있는 상대방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명목상 부부의 모습만을 유지하였다.
준이 이상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영접하고 마침내 자신의 전 생애를 전환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검은 개와 조우한 이후였다. 검은 개는 소설 안에서 거대한 악의 화신인 것처럼 묘사된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이 안될 만큼 거대한 개들과의 만남, 그 엄청난 공포심 앞에서 준은 신의 존재를 느낀다. 준이 온 몸으로 버나드를 부르던 그 순간 버나드는 땅을 기어가는 벌레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야기 전개상 벌레가 소설 안에서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 듯 보이나 검은 개와 함께 거대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것과 지극히 물질적인 벌레, 심지어 하늘과 반대에 있는 땅 위를 기어 다니고 있는 벌레. 둘은 양 극단에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양극단으로 물러서 있는 그들의 삶이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양극단은 통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양극단에 선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같은 노력을 해왔고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형태는 달랐지만 그들은 각각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버나드와 준을 보며 한국문학사가 떠올랐다. 혹자는 90년대 한국작가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일컫는다. 한국 근대사가 시작된 이후 끊임없이 독재에 저항하는 글을 써 온 작가들이 90년대에 들어 민주화를 맞이한 이후 도리어 가치갈등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독재를 향한 투쟁의 열정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사상은 없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지만, 민주화가 도래함으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준과 버나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워줄 일종의 삶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형태가 달랐을 뿐 이는 결국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필자 또한 옳다고 여기는 정의를 위해서는 현실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한다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킬 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핑계였다는 점을 고백한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의 동의어는 ‘삶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삶보다 신념이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평범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와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탈당 이후 양극단의 삶을 추구하였던 준과 버나드도 결국 인간으로 살기 위한 분투를 하였던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논리일까. 소설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다음 세대인물인 제러미와 제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면 어떨까.
작품을 읽다보면 수용소를 묘사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거의 세 페이지에 걸쳐 수용소의 참상이 드러난다. 글로 읽지만 너무도 참혹해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작품의 중심이 되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수용소 바로 다음 장면이었다. 제러미는 수용소를 나와 제니에게 키스한다. 생명이 무자비하게 몰살된 참상 앞에서 연인에 대한, 연인의 육신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제러미의 행동이 몰염치해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 앞에서 살아있음을 자랑하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기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면서도 삶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 애잔한 마음마저 들었다. 준이 종교에 귀의함으로써, 버나드가 과학에 심취함으로써 삶을 이어가려 했던 것처럼 제러미와 제니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함으로 인간의 삶을 살려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분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회주의, 이상주의, 종교, 과학, 합리주의, 사랑 등 여러 가치들이 등장했지만 삶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만이 보였다. 소설에는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 치밀하게 담겨있어야 하며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인간을 깊이 있게, 그리고 치열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좋은 작품을 알게 되어 뿌듯하다.
[ 인상 깊은 문구 ]
※서평이라고 하기엔 인상 깊은 문구가 지나치게 많지만 소설에서 던지는 메시지와 별개로 표현 자체가 탁월한 부분이 많았기에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룹원분들이 좋은 부분들을 함께 읽어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리지 않고 기록하였습니다.
준과 버나드는 바로 이때 입당을 감행했다. 전쟁과 계급 억압이 없는 건전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당에 소속되는 것으로 젊고 활기차고 지적이고 과감한 모든 것과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36 –
준은 완벽하게 세상에서 자신을 단절시켰고, 내가 알아챌 수 있는 한 후회는 없었다. 그녀에게 바깥세상은 영원히 떠난 나라, 아직은 기꺼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나라에 불과했다. 나는 준이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고 지루한 이곳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무자비하게 삶은 야채며, 불평 많고 구시렁대는 노인들, 멍하게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그들을. 자족적인 인생 후에 이런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라면 크게 당황하거나 끊임없이 탈출을 계획할 것이다. 하지만 고요에 가까운 준의 묵종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편하게 해주었다. – p.47 –
순수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진이다. 동결된 내러티브라는 아이러니 탓에 사진 속 주체들은 모두 앞으로 변하거나 죽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순진무구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미래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신이 모든 것을 알듯이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누구와 결혼할지, 언제 죽을지-알고서, 언젠가는 누군가 우리 사진을 들고 있으리란 생각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본다. – p.51 –
우리는 자신을 지금 현재로 해방시키지 못했지. 대신 남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했어. 그들의 불행으로 우리 자신의 불행을 덮어버렸어. 인생이 선사하는 소박하지만 좋은 일을 받아들이고 그걸 가진 데 기뻐할 줄 몰랐던 게 우리의 불행이었지. 정치란, 이상주의적인 정치란 언제나 미래에 대한 거잖아.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배운 건 이거야. 사람은 현재에 충실히 임하는 순간, 무한한 우주, 무한한 시간, 어떻게 보면 신이라 할 만한 모든 것을 발견한다는 것. – p.59 –
나는 장모님이 싫어졌거나 당혹스러운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줄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반대로, 나는 그녀가 좋아졌다. 준이 흥분한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마음이 아직 중요하다는 게, 지난날의 인생과 문제가 아직 지속된다는 게, 황혼기에도 아직 모든 것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게, 무덤처럼 차가운 초연함이 없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 p.61 –
영혼, 사후세계, 의미로 가득한 우주. 기꺼운 그 믿음이 주는 바로 그 편안함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신념과 이기심은 서로 너무도 긴밀하게 얽혀있다. – p.87 –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대사처럼, 임관설교에서 파편처럼 점점이 기억에 남은 것은 몇몇 뛰어난 문장, 책 제목들, 한때 살아 숨 쉬었으나 죽어가는 반복적인 운율. 그리고 척추를 따라 저릿하게 흐르던 긴장감이었다. 나는 버나드를 지켜보았다. 그는 손을 늘어뜨리고 신부 오른 쪽에 서서 차 안에서 그랬듯이 앞만 바라보며 자신을 잘 추스르고 있었다. – p.90
대략 준비해둔 어색한 몇 마디를 건네려고 다가갈 때 그가 벽 너머로 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더 가까이 가보니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폈다. 그는 그늘 속에서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며 울었다. 나는 사생활을 침범한 듯한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 방향을 돌려 무덤을 덮고 있는 두 남자를 지나 한담 중인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 p.91 –
흔히들, 특히 요즘 많이 인용하는 이사야 벌린의 말이 있지. 유토피아의 치명적인 성격에 대한, 인류를 평화와 정의, 행복과 무한한 창의성으로 인도할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른들 아깝겠는가? 이상적인 오믈렛을 만들 수 있다면 달걀을 무제한 깨뜨려도 좋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수백만이 영원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수천 명이 죽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 결국 모순은 너무 커지고, 신념은 깨지지.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와. 나는 56년에야 탈당했지. 53년에도 그럴 뻔했지만 48년에 진작 그만둬야 했어. 하지만 그냥 남아있는 거지. 사상은 올바른데 잘못된 사람들이 책임을 맡은 거다. 변할 거다, 하면서. 그리고 이 훌륭한 과업을 어찌 다 쓰레기로 만들겠나. 이런 일은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아직 실천이 이론만큼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들려오는 소식은 다 냉전 하의 증상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러. 게다가 내가 어떻게 그렇게 틀릴 수 있는가. 그토록 많은 똑똑하고 용감한, 선의를 품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틀릴 수 있는가 하면서. -p.126-128-
그는 말을 멈추었다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게 준과 나의 차이야. 준은 나보다 수십 년 전에 당을 떠났지만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어. 환상과 현실을 구분한 적이 없지. 한 유토피아를 다른 유토피아로 바꾼 거야. 직업 정치인이든, 목사든 중요치 않아. 뭐가 됐든 그 여자는 본질적으로 강경파였어…….” – p.128 –
나는 마을 인구 4분의 3을 차지하던 유대인을 모조리 삼켜버린 수용소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부를린과 마이다네크는 물질과 반물질처럼 나라니 붙어 있었다. 우리는 정문의 안내문을 읽으려고 멈춰 섰다.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이 여기서 죽었다고 쓰여 있었다. 수용소는 매우 조용했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순간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제니의 속삭임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렇죠? 아직도 진행형인 거예요. 그게 정부의 입장이고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검은 개인 거네.” 나는 마지막 한마디는 그냥 지나쳤다. 나머지 말에서 과장을 빼고 남은 진실만으로도 마이다네크는 망각을 경계하자는 고결한 시민정신을 담은 기념물에서 상상의 질병이자 살아있는 위험으로, 악에 대한 무의식적인 묵인으로 한순간에 돌변했다. 나는 제니와 팔짱을 끼고 아직 사용 중인 초소를 지나 바깥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초소 문간에는 꽉 찬 우유 두 병이 놓여 있었다. 강박적으로 정돈된 수용소에서 가장 최근 더해진 것은 몇 센티미터 쌓인 눈이었다. 이 무인지대를 가로지르면서 우리는 슬며시 팔짱을 풀었다. 앞쪽으로는 감시탑이 있었는데 버팀기둥 위 낮은 막사에 뾰족한 지붕을 얹고 나무사다리를 가져다놓은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이중으로 된 안쪽 담장 사이를 볼 수 있었다. 안쪽 담장 안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길쭉하고 낮은 막사가 많이 있었다. 그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채웠다. 그 너머로는 주황색과 흰색 하늘을 배경으로 굴뚝 하나짜리 더러운 부정기 화물선처럼 소각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말이 없었다. 제니는 지시사항이 적힌 메모를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견학 온 학생들 무리를 따라 막사 한곳에 들어갔다, 안에는 몇 개의 철조망 우리에 말린 과일처럼 납작하고 쭈그러든 신발이 가득 차 있었다. 수천수만 개의신발이었다. 다른 막사에는 신발이 더 많았고, 세 번째 막사에는 믿기 어렵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신발이 우리 안도 아니고 바닥에 수천씩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먼지 틈으로 어린양 장식이 아직 남아 있는 아기 신발과 그 곁에 놓인 징 박힌 부츠 한 짝을 보았다. 넝마로 변한 생명이었다. 엄청난 규모에, 말로는 너무 쉬운 숫자-수만, 수십만, 수백만-에 상상력은 올바른 연민을 저지당했고, 고통의 참상은 제대로 알 길이 없었으며, 방문객은 박해자의 전제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었다. 생명은 값싼 것이며 무더기로 쌓아놓고 검사해야 할 쓰레기였다. 더 걸어 들어가면서 내 감정도 죽어버렸다. 우리가 도울 길은 없었다. 먹이거나 풀어주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관광객처럼 거닐고 있었다. 방문객은 이곳에 와서 절망하거나 아니면 손을 주머니에 더 깊숙이 찔러 넣고 따뜻해진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악몽을 꾸는 이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수치이며 우리 몫의 참담함이었다. 우리는 다른 쪽에 있었고, 과거 수용소장이나 그의 정치적 우두머리가 그랬듯 이곳을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저런 것을 구경하면서, 출구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 우리가 멀쩡히 다음 번 식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얼마 후 나는 더는 희생자들을 생각할 수가 없어 그들의 박해자들만을 생각했다. 우리는 막사사이로 걸었다. 얼마나 잘 지어졌던가, 얼마나 오랫동안 건재했던가, 우리가 걷는 길에서 가지런히 샛길이 뻗어나가 각 막사의 앞문으로 이어졌다. 막사는 우리 앞으로 아주 멀리까지 펼쳐져 그 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수용소 일부의 한 줄에 불과했고, 이곳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수용소였다. 나는 외려 감탄하게 되었고 음울한 경이에 잠겼다. 이런 과업을 꿈꾼다는 것이, 이런 수용소를 기획하고 짓고 그토록 공들여 집기를 들이고 운영하고 유지하고 마을과 촌락에서 인간 연료를 거둬온다는 것이. 그 정력이라니, 헌신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을 시루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 p.156-159 –
우리는 수용소를 나와 부를린을 다시 걸어갔다. 나는 그곳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바르샤바를 망가뜨린 파괴와 전후 재건도 그곳은 비껴갔다. 우리는 가파른 길에 있었고, 젖은 길의 포석이 밝은 주황빛 겨울 석양을 받아 황금빛 둥근 손잡이처럼 보였다. 오랜 감금 끝에 풀려난 듯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루블린의 특별할 것 없는 러시아워의 평범함 속으로 돌아온 것이 흥분되었다. 제니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고는 카메라 끈을 느슨하게 풀어 메고 파리에 요리를 배우러 온 폴란드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앞서 섹스와 사랑에 관해 말을 아끼는 편이며 유혹에 약한 것은 누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 억제하던 자아에서 해방되어 나답지 않게 훌륭한 일을 했다. 나는 말하고 있는 제니를 멈춰 세워 입을 맞추고 그녀가 내가 만나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며,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남은 하루를 보내기를 그 무엇보다 더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초록색 눈으로 내 눈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팔을 들었다, 나는 잠시 따귀를 맞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길 건너 좁은 문 위로 빛바랜 간판이 걸린 곳을 가리켰다. 우리는 황금빛 둥근 조약돌을 밟으며 비스와 호텔로 갔다. 택시 기사는 보내고 그곳에서 사흘을 지냈다. 열 달 후, 우리는 결혼했다. -p.160으로 추정-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버나드를 용서하실……” “고맙지만 우린 신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어. 기독교인들이 사랑이란 말을 독점해버리다니, 어찌나 혐오스러운지.” – p.170 –
단단한 졸참나무 잡목이 여기저기 갈라진 돌 틈과 산턱에서 약간의 흙과 뿌리내릴 공간을 찾아 자라나 있었다. 가장 혹독한 곳에서 생명유지에 집착하게 만든 그 광기어린 힘을 목도하고 준을 질려버렸다. 심한 욕지기가 치밀었다. (…) 산봉우리는 무시무시했고,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협곡은 끔찍했고,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은 혼돈이자 타락 후 낙원을 잃은 인류에 대한 징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 p.200-201 –
개들은 불온한 전진을 계속했다. 준은 뒷걸음질 쳤다. 감히 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버나드를 한 번, 두 번, 세 번 불렀다. 햇살 머금은 공기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힘없이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개들은 더 빠른 속도로, 거의 총총 걸음으로 다가왔다. 두려움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개들은 준에게서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되었다. – p.208 –
뺨이 땅바닥에 닿도록 무릎을 꿇고 대장 애벌레의 머리를, 불가해한 요소들을 경첩으로 이어놓은 듯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외계에서 왔다고 상상해도 무리 없을 만큼 희한하고 진기한 동물들과 이 행성을 공유하고 있구나. 하지만 이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더는 돌아보지 않지. 아니면 하도 작아서 유심히 보지 않거나. – p.211 –
꼬냑이 그녀의 뱃속을 덮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 경험이 끝났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아무리 나빠봐야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녀가 잘 해쳐나온 이야기였다. 그녀는 안도감에 사랑스러운 버나드에 대한 애정을 기억해냈고, – p.219 –
덥고 점심까지 먹어서 베르주리테드나를 향해 힘겹게 산길을 올라가는 내내 이 음울한 일이 두 사람의 마음에 남았다. 두 사람은 산중턱에서 길게 뻗은 공처 앞 작은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오래 멈추었다. 버나드는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게 된다. 두 사람이 물병의 물을 마시는 동안 버나드에게는 최근 끝난 전쟁이 역사적, 지정학적 사실이 아니라 다수의 문제로, 무한에 가까운 개인들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먼지처럼, 홀씨처럼 온 대륙을 뒤덮은 사람들 사이에 미세하게 나눠지는, 그러나 작아지지 않는 가벼운 비통이었다. 개체로 그들은 영영 무명의 존재로 남을 것이며, 전체로서 그들이 상징하는 슬픔은 누구 하나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남편과 형제 둘을 잃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처럼 수십만, 수백만 명이 침묵 속에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저마다 특별하고 미묘하고 애절한, 달라질 수도 있는 사랑이야기들이, 마치 전에는 전쟁에 대해, 전쟁의 대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 일의 세부사항 때문에, 일을 잘해내느라 너무 바빴고 그의 넓은 시야는 전쟁의 목적과 승리, 통계 수치상의 죽음, 통계 수치상의 파괴와 전후 재건을 향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면에서 재앙의 규모를 감지했다. 이 모든 고유하고 외로운 슬픔, 그것은 국제회의나 헤드라인, 역사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부엌으로,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침대로,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이런 깨달음이 1946년 랑그도크의 소나무 한 그루 옆에서 버나드에게 다가왔다. 준과 나눌 수 있는 단상이 아니라 깊은 우려로, 진실에 대한 인지로 나타났다. 그는 낙담한 나머지 침묵했고 뒤이어 의문을 품었다. 망각은 비인간적이고 위험하며 기억은 끝없는 고문이 될 터인데, 이런 먼지와 홀씨로 뒤덮인 유럽에서 어떤 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 p.234-235 –
고원의 높은 절벽 아래 웅크린 이 작은 땅뙈기에서 그녀는 안전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변화했다. 이것, 지금, 이곳. 분명 이것이 존재가 원하는 것이었고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맛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어두워져가는 부드러운 여름 공기, 발에 밟히는 타임의 향기, 배고픔, 해소된 갈증, 셔츠를 통해 느껴지는 따스한 돌벽, 입안에 남은 복숭아의 맛, 손의 끈적거림, 피로한 다리, 땀에 젖고 햇볕에 그을리고 먼지를 들쓴 피로, 이 어둑하고 사랑스러운 장소,(…) –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