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2022년에 읽은 책이다. 이번 지정도서로 선정되며 인상을 찌푸렸는데, 새로운 사람들과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일테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책을 펼치는 순간 다시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의 문제는 저자다. 흔히 ‘설명이 필요한 개그는 실패한 개그’라고 한다. 도서 전반에 걸쳐 저자의 실패한 개그가 무수히 많다. 오죽하며 저자의 사진도 찾아봤다. 에릭 와이너.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라고 하는데 강연은 얼마나 잘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도무지 도서 전반에 걸친 아재 개그는 읽기가 힘들다.
아마도 철학 책이 너무 따분할 수 있으니 읽힐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겠거니 싶다. 그런데 독자를 누구로 잡았는지 번역자가 각주를 달기도 한다. 그 각주가 개그를 설명하는 용도라면 정말이지 개그는 실패한 것이다.
글을 읽는데 재미를 주기는 커녕 방해를 할 정도니, 솔직히 그 개그 때문에 나는 이 책의 별점을 깎았다. 하찮은 개그를 읽고 있자니 내 귀한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다.
에피쿠로스
2022년에도 그랬지만, 2024년에도 내가 책을 읽으며 생각이 깊어진 부분은 에피쿠로스 편이다. 쾌락주의를 논하지만 쾌락의 정의를 ‘고통 없음’으로 정한 것. 즉,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그야말로 도인이다.
가끔 길을 잃을 때가 있다. 두 번째 창업을 하고 나서는 그 빈도가 느는 것 같다. 가끔은 분명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를 저었건만, 정신차려보니 반대로 가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그동안의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명성이나 부가 아닌 마음의 평화, “존재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기쁨”이다. 그러한 상태를 무언가의 부재가 아닌 측면에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현 세대는 많은 것을 원한다. 더 나아지길 원하는 것을 넘어 타인보다 나아지길 원한다. 결국 이런 경쟁과 질투가 인류를 발전으로 이끈 부분도 있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존재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기쁨’을 진지하게 생각해봄직 하다. 무려 기원전 341년에 태어나 활동했던 에피쿠로스의 철학 말이다.
생각을 덜 하세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창업을 하고 많은 것을 얻었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 그들과 1시간, 2시간씩 공감하며 나눌 이야기가 생겼다는 것은 참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얼마 전 만난 대표님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오대표님, 생각을 덜 해보세요. 아마 지금 하시는 것의 30%를 덜 해도 같은 결과를 도출할 겁니다.
생각이 많은 게 때로는 큰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무작정 행동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철학자들의 정제된 생각이 부럽다. 이미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 어떤 개념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웹툰처럼 ‘상태창’을 외쳐 이 세상 모든 수치를 보고 싶다. 그럼 생각을 덜할 수 있지 않을까?
한줄평
- 두 번째 읽어도 정이 안 가는 실패한 컨셉
인상 깊은 문구
- 걸음걸이는 지문이나 서명처럼 개개인이 다 다르며, 최근 국방부에서는 95퍼센트의 정확도로 걸음걸이를 식별할 수 있는 첨단 레이더를 개발했다.
- 정원은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뒷마당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이 정원사가 아니듯, 생각한다고 다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정원일과 철학은 둘 다 어린아이의 관대한 즐거움이 수반된 어른의 절제된 헌신을 필요로 한다.
-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은 명성이나 부가 아닌 마음의 평화, “존재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기쁨”이다. 그러한 상태를 무언가의 부재가 아닌 측면에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우리는 오직 딱 한 번 태어난다. 두 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의 삶이 우연의 결과물, 원자 운동에서의 일탈, 일종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삶을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올바른 마음가짐만 갖춘다면 아주 적은 양의 치즈만으로도 소박한 식사를 성대한 만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 철학은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다. 철학은 이의를 제기한다. 요구한다. 가장 훌륭한 철학자는 가장 요구가 많은 철학자다.
- 시몬 베유의 당부는 더 단순하지만 결코 더 쉽진 않다. 베유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사실이다. 많은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 인내심은 좋은 덕목이다.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내심은 자신에게도 좋다. 여러 연구가 인내심 있는 사람이 안달 내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내심 있는 사람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 이들은 대처 기술도 더 뛰어나다.
- 심지어 역을 실제 간격 그대로 표시해서 더 큰 혼란을 주었다. 역과 역 사이가 얼마나 먼지, 지하철을 탈 때 머리 위에 어떤 도로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한 것은 이 역에서 저 역까지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지, 어디서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