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믿느냐 물으면 절반만 믿는다 말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이 그걸 증명한다 하겠다. 이 책은 내가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책이다. 모임에서 결정된 책을 읽었을 뿐이다.
지난 2022년 3월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나는 힘든 시기에 책에서 답을 찾곤 하는데, 이번에는 책을 들춰볼 여유도 없었다. 뭔가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글은 커녕 영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계속 잤다.
내 현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 확진은 물론 여러 건강 이슈와 인간 관계, 일 등 많은 문제가 한 번에 몰려오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우울한 뉴스에 내 인생 자체에 우울증이 온 듯 했다. 모든 걸 놓아야 하나 고민을 한 게 얼마만인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채 끙끙 앓았던 적은 창업 시기 이후 처음인 듯 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참 우습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꽤 훌륭하게 회복했다.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관계가 남았지만, 그 자리는 새로운 것으로 채울 계획이다.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이 다시 재구성되는 시기가 고작 한 달 남짓이었다니, 그동안 아등바등 했던 게 스스로 우스워보일 정도다.
그리고 꽤 회복된 내게 운명처럼 이 책이 찾아왔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름은 수도 없이 들었던 그 책이다.
빅터 프랭클
빅터 프랭클이란 이름은 못 외워도 죽음의 수용소는 들어봤을 것이다. 나치 시절 지옥을 현실화 했던 수용소. 저자 빅터 프랭클은 무려 3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아남았다.
2차 세계대전 이야기는 학창시절 억지로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통해 어두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된 지금 죽음의 수용소 이야기는 과거 내가 경험한 공포와 두려움 등이 떠올라 다소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저자보다는 훨씬 짧은 시기였지만 군대 훈련소가 떠올랐다. 두려움에 떨며 입대해서 머리를 밀리고 현실을 강제로 지워냈던 기억. 비슷한 나이 청년이라는 것 외 아는 게 없는 동기들.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했던 교관들. 감히 수용소에 비할바겠냐만은 그 시절 느꼈던 공포감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머리털뿐만 아니라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조리 다 깎아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를 하려고 다시 줄을 섰다. 서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인간이 가진 공포는 다 똑같구나 싶더라. 하루하루 견디는 것 만큼 힘든 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견뎌내면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는 게 신기했다. 정말이지 일주일은 짧은데 하루는 길었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그래도 군대는 정해진 기간이 있었고 하루하루 날짜를 지우며 버텨냈다. 만약 군 생활은 정해져있지만, 훈련소를 떠나는 날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그때 느꼈던 감정은 조금 달랐을 것 같다.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3년 동안 겪은 이야기를 몇 페이지 정도로 어떻게 이해하겠냐만은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내는 등 몇몇 지점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현대에 사는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식의 진행이었으면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과거보다 현재가 좋기에 행복해야 한다는 관점은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 책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최근 깊었던 구렁텅이에서 내가 빠져나왔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풀었다. 삶의 의미 말이다.
삶의 의미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지난 3월은 내가 그려온 큰 그림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시기가 됐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열심히 그려둔 그림이 모조리 부숴졌을 때 그 막막한 감정을 겪었다. 아직 부숴지지 않은 그림도 어쩌면 앞으로 그릴 그림과 맥락이 다르기에 다시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남은 그림을 나 스스로 부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빅터 프랭클도 수용소에 들어간 뒤 책 원고를 모조리 빼앗겨 힘들어했다. 인간이 이렇게 나약하다. 손에 쥔 뭔가를 빼앗기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좌절감을 겪는다.
와르르 무너진 내 그림을 보며 그림을 그렸던 시기를 떠올렸다. 어차피 무너질 그림이었다면 나는 그동안 왜 이 그림을 그렸나 싶었다. 무너진 그림이 현실이라면, 그동안 나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았나 싶었다. 현재의 나를 구성했던 과거가 부정당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낸 내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 도저히 그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공허했다. 마침 코로나 확진으로 집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 과거와 현재가 모두 부정당했다면, 과연 내게 미래가 있을까 싶었다. 미래가 없다면 내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싶었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가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 많은 사람이 새로 얻게 된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나를 마주하는 많은 게 힘들어 혼자 있고 싶었는데, 막상 혼자 있으니 그게 또 힘들었다. 가진 걸 잃어서 너무 아팠다. 아프고 아프다 보니 이거보다 더 아픈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가장 아픈 거라면 이제 더 아플 일은 없는 것 아닌가?
문득 내가 정말 다 잃었나 생각해봤다. 여전히 남은 걸 다 버려야 할까 싶었다. 혹시나 싶어 머릿속으로 내 모든 걸 던져봤다. 더 버리려 했지만 버릴 수 없는 온전한 나만의 것이 여전히 남아있더라.
이제 더 버릴 수도 없고, 이제 더 아플 수도 없다면. 이미 다 버렸고, 이미 다 아팠다면. 그럼 이제 겁 없이 더 그림을 그려도 되는 것 아닐까? 마치 항체가 생성돼 다시는 확진될 확률이 낮아진 펜데믹처럼. 어쩌면 아픔을 겪었던 분야에서 나는 꽤 강한 항체가 생긴 것 아닐까?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 다 버렸더니 꽤 괜찮아지더라. 앞으로 얻을 일만 남았다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이 나아지니 여전히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게 눈에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기며 내게 속삭였다. 다시 찾아보라고. 삶의 의미를.
로고테라피
최근 몇 년 동안 정신과를 가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아직 가보진 않았지만 병원을 알아보기도 했었다. 아마 다음 위기에는 병원에 가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있을지 모르지만 로고테라피 이론을 따르는 의사가 있다면 만나보고 싶어졌다. 수용소에서 바닥을 경험한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사회를 살아가며 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지난 3월은 내게 3번 의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줬다. 시련에 관해 내 태도를 선택해야 했고, 이번 시련도 어쨌든 잘 극복한 듯 싶다. 그 과정이 썩 고통스러웠지만 아마 같은 시련이 온다면 이번엔 나도 호락호락 하지 않을 것 같다.
시련을 이겨내며 꽤 많은 휴식을 부여했다. 그런데 휴식보단 로고테라피 이론처럼 어떤 과제들이 내게 더 힘을 줬다. 생각해보면 휴식을 더 취한다고 해서 에너지가 더 충전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못 해도, 언젠가 로고테라피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와 내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 생각한다.
마무리
매달 서평을 써왔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무려 두 달을 거르게 됐다. 지금 되돌아 보면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싶다. 빅터 프랭클은 내 상황에 유머를 넣을 수 있으면 치료할 수 있는 단계라고 했다. 아마 나도 그래서 치료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이런 부지런함은 내 캐릭터지만 아무리 부지런해도 완벽한 평화를 얻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다행히 빅터 프랭클은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어쩌면 그게 더 우리에게 위험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 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종종 내 미래가 기대될 때가 있다. 이럴 땐 내 몸에 에너지도 넘치고 시야가 또렷해진다. 자신감이 붙고 기분도 좋다.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전히 나는 내 삶에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나는 선택지를 보며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오늘이다.
한줄평
명작은 이유가 있구나.
인상 깊은 문구
-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내 신념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용기를 가져야 했다.
- 그날 저녁에야 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가진 깊은 뜻을 알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는 죽음을 선고 받았다. 판결은 채 몇 시간도 못 돼 집행됐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 이어서 우리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머리털뿐만 아니라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조리 다 깎아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를 하려고 다시 줄을 섰다. 서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중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그다음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는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세 번째 사람도 앞사람이 했던 것과 똑같이 죽은 사람의 외투를 가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진짜 구두끈을 갖게 됐다고 좋아했다.
-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치는 걸 보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깨우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 그때서야 깨달은 것인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수용소에서는 즉석에서 카바레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잠깐 막사 안을 깨끗이 치우고, 나무 의자를 밀거나 함께 못질을 한다. 그런 다음 프로그램을 짠다.
-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내에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환자들의 맥박을 일일이 재어보고 상태가 위급한 환자에게 반 알씩 주었다.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는 약을 주지 않았다. 약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것이 결국 가망 있는 환자들을 위해 써야 할 약을 빼앗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다 죽어 가는 병자의 몸은 바퀴 두 개 달린 수레에 던져진다. 동료 수감자가 그 수레를 끌고 대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몇 마일이나 걸어서 다른 수용소로 옮긴다. 만약 병자 중 한 명이 수레가 떠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로 수레에 던져진다. 리스트에 올린 번호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번호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됐다.
- 나는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 친구에게 그와 함께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연한 태도로 환자 곁에 그대로 남기로 했다고 친구에게 말하자마자 그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난다.
-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 강제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 그날 나는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 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과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쪽 신발 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고 대신 수용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앞에서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그렇지만 정작 자유를 얻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어떤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슬프다! 수용소에서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용기를 주었던 그 사람이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슬프다!
-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89퍼센트의 사람들이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그중 61퍼센트는 자기 삶에 기꺼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어떤 것’과 ‘어떤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의지도 좌절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 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 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 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가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 많은 사람이 새로 얻게 된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 ‘일요병’을 예로 들어 보자.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기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 고인이 된 조지아 대학 심리학 교수 이디스 와이스코프 조웰슨은 로고테라피에 관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 정신 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 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 온 것이다.’
-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 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마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 <텍사르카나 가제테>지에 의하면, 제리 롱은 3년 전에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목 아래 부분이 마비됐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17살이었다. 요즘 롱은 입에 막대를 물고 타이프를 친다.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리 롱은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신조가 됐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내 장애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도달한 인간적인 성숙은 불가능했을 겁니다.”